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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필론의 돼지
이문열 필론의 돼지 해설
이문열 필론의 돼지 해석 해설입니다. 1989년에 간행된 소설집 <필론의 돼지>에 수록된 작품. 위기의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의 일면을 그려, 인간이 지닌 본원적 모습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있는 것으로,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위선과 모순을 주제 의식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 ‘그’에 대하여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무능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약점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이문열 필론의 돼지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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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필론의 돼지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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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그’는 제대를 하고 군용 열차를 이용해 고향으로 가고 있었다. 거기에서 두메 산골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학력을 속여 그와 함께 훈련을 받고 다른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함께 제대를 하게 된 홍동덕을 만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기만 하던 홍동덕은 군 생활 30개월만에 세상 때가 가득 묻은 엉뚱한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의 만남과 함께 군용 열차가 가고 있을 때, 불량스러운 현역 군인 일당이 차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제대병들에게 강제로 돈을 뜯는다. 이러한 폭력적 사태에 아무도 손을 못 쓰고 눈치만 보고 있는데, 주인공 ‘그’도, 홍동덕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제대병들을 일깨워 마침내 그 불량 군인들을 집단 구타하게 된다. 이 집단은 이성을 잃고 마침내 그 불량 군인들이 죽을 지경까지 계속 구타를 한다. 이 때 속수 무책으로 사태만 보고 있던 ‘그’는 필론이라는 현자(賢者)가 폭풍으로 흔들리는 배 속에서 보았다고 하는 돼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폭풍으로 세차게 흔들리는 배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돼지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쿨쿨 편안히 잠만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이문열 필론의 돼지 배경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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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열의 언어-사물화된 지성 : 이문열 소설을 읽으면 말할 수 없는 어떤 답답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부정과 긍정의 두 측면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긍정의 측면은 현실을 너무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위로서의 진실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진실이 인간이 사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진다. 그래도 그런 진실을 신화적 세계에서나마 찾고 싶어하는 것도 사실이다. 진실이 없는 것도 사실일 수 있지만, 없는 진실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실이 있다는 것도 진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비극은 이 당위와 존재 사이의 간격에서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랑이 있어야 할 것으로 믿고, 또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간 그런 이야기를 접해 본 경험도 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런 세계는 가능할 것인가? 이문열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이문열의 초기 작품은 낭만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잃어버린 아름다운 사랑을 되돌아보기, 젊은 날의 쓸쓸한 고뇌와 그 지성적 몸부림의 추억들, 이런 것들로 우리를 애잔하지만 아름다운 세계로 곧장 이끌었다. 그가 그런 낭만적 세계에 바탕을 둔 이유는, 필자 생각으로 낭만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세계에서 낭만을 생각하는 아픈 몸짓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문열은 초기의 낭만적 경향에서 차츰 이 사회의 생리와 진실을 탐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넓혀 갔다. 그 탐구의 결과는 인간은 결코 신뢰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는 따뜻함은 없다. 차가운 지성의 목소리가 결국 배어 나오고 마는 것이다. 이문열의 소설은 그것이 지적인 탐구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지적인 언어, 다시 말하면 관념적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면, 그의 소설이 독자를 사로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교과서와 같은 교양을 충분히 담으면서도 그의 언어는 언제나 구체적이고 사물화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소설이 문학의 본질에 충실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을 읽을 때, 한 순간도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은, 그 지적인 깊이와 함께 문학적 매력이 우리를 붙잡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읽었듯이, 이문열은 인간의 삶, 특히 인간 관계의 삶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것의 생리는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떻게 인간의 삶이 결정되고 또 살아가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초점화된다. 이 작품에서도 집단과 개인이라는 사회의 진실이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구체화되면서 이문열 특유의 탐구 작업이 수행되고 있다.
□ 슬픈 민주주의의 역사 : 이 작품의 사건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제대병이 탄 기차에 특수부대 현역 군인이 타서 폭력을 휘두르며 돈을 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에 대응하는 제대병들의 행동이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듯한 사건 자체를 그리려고 했다면, 그것은 흥밋거리에 불과해진다. 그러나 이문열은 언제나 특수한 사건에서 보편적 진실을 이끌어 내는 마술을 지니고 있다. 이 작다면 작은 사건으로 그리려고 하는 것은, 객차라는 공간을 인간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해 드러나는 인간의 보편적 심성과 본질이다. 우선 이 객차의 주인은 제대병이다. 그들의 편의를 위해 제공된 열차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속에서 편안한 휴식을 즐길 자격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이 주인에게 폭력과 갈취를 일삼는 무리, 즉 검은 각반을 찬 특수 부대원이 난입하여 주인들을 괴롭히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구조와 생리 자체이다.
국가의 주인은 백성이다. 그러나 백성이 주인이라고 하지만, 주인 위에 군림하며 주인을 부리는 소수의 집단이 있게 되는데, 그들이 이른바 권력자들이다. 권력은 백성이 부여해 준 힘이고 백성이 부여해 준 힘대로 그것이 행사된 적이 있었던가? 우리가 준 힘을 되찾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모순에 찬 현실인 것이다. 현역이 제대병에게 돈을 거두어들일 명분은 어떤 경우에도 없다. 그런데 그들은 억지 논리로 돈을 강요한다. 그것은 이 제대병들이 육군 졸병 출신들이고 자기들은 고생하는 특수부대원이라는 것이다. 즉 육군은 집단의 수가 많은 만큼 그들은 잡부스러기와 같은 존재이며, 특수 요원은 비록 수효는 적지만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선택된 계급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평등과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원래의 위상이 차이가 나므로 의당 그들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 작품에 그려지고 있는 실상은 사실은 허구이지만, 한국에서 군대를 다녀왔고, 한 번쯤 군용열차를 타 본 사람이라면, 그 상황이 실제 상황임을 잘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현실을 매우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얼토당토 않은 상황은 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문화적인 배경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우리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의 역사는 짧았고, 또 그 민주주의의 자유와 합리를 터득한 자들도 모자랐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모순이 사회에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무서움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독재의 완강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민중들을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획일적으로 통제하였으며, 여기에 길들여진 민중들은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고, 그것이 한 개인의 힘으로는 퇴치할 수 없는 구조적인 것으로 변질되었을 때는 그것을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받아들이는 타성에 젖어 버린다. 검은 각반들이 객차에 와서 술값 조로 돈을 청할 때, 별다른 거부 반응이 없는 상황이 이것을 말해 준다. 이렇게 지배의 속성은 언제나 지배와 맹종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슬픈 것이었다.
□ 저항의 몇 가지 방식들 : 그러나 이 작품이 그런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렇게 답답해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폭력의 본질을 파악하는 아픔이 따르기는 하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의욕도 함께 수반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으며 우리가 절망에 빠지는 진정한 이유는, 그 폭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 앞에 선 민중들의 속물 근성에 있는 것이다. 민중은 다수이고, 그들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우리는 인간에 대해 신뢰할 수 없으며, 참담한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검은 각반들이 들어와 폭력을 휘두르고 돈을 거둬 가도 말없이 순종할 뿐이다. 더구나 대학까지 마쳤다는 주인공 그의 태도는 이 폭력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이 노무 차에는 헌병도 없나? 만날 이 꼴이고.” 앞좌석 홍이 마치 그의 기분에 맞장구라도 치듯 투덜거렸다. 그는 갑자기 홍이 밉살스러웠다. 몇 명의 난폭자에게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는 백여 명의 동료들에 대한 혐오감이 갑작스레 홍에 대한 증오로 변해 버린 것일까. 그러나 이내 그 증오는 다시 혐오로 되돌아왔다. 아, 나의 팔은 너무 가늘고 희구나, 내 목소리는 너무 약하고, 내 심장은 너무 여리구나, 저들의 폭력을 감당하기에는, 학대받고 복종하는 데 익숙한 내 동료들을 분기시키기에는. 그는 참담한 자기 혐오감에 떨고 있다. 그의 여린 지성과 유악한 성격은 야만적 폭력 앞에 아무런 힘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앞좌석의 홍똥덩이에게 증오감을 가지는 것은, 자신이 홍과 다를 바 없다는 때문인데, 그것은 치욕과 같은 일이라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홍은 국졸도 아닌 학력의 무식한 머슴 출신이다. 홍과 그는 군대라는 사회에서 같은 구성원이었다. 외형적으로 똑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치욕으로 느껴진다.
대학을 마친 지성인과 무식쟁이 촌놈이 동등한 위상이 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 폭력자들 앞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홍이나 그나 다를 바 없다는 데 이르면 , 그의 참담한 절망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은 무기력한 지성에 대한 자기 혐오의 감정이 홍에게 투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폭력의 당사자에 대한 증오감이 아니라 홍에 대한 증오감으로 번질 때 이 지성은 너무도 허약한 것이고,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다가 영웅이 드디어 등장한다. 그 폭력을 보고 있을 수만 없어 용감하게 일어선 제대병 하나가 각반들의 폭력성과 맞먹는 완력과 자신의 경력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결국 ‘그’와 같은 지성의 힘이 아니라, 폭력자들과 같은 완력으로 그들과 맞서게 된 상황이다. 그러나 이 영웅도 폭력자의 회유에 의해 이내 위력을 잃고 만다. “냄새나는 땅개 새끼들하고 어울리지 말고 우리 같이 한 잔 하지.”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영웅은 결국 ‘땅개 새끼’보다 나은 위상의 각반들의 세계로 편입하고 마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현대사에서 폭력에 항거하던 사람들이 폭력자의 편에 가담해 버린 경우는 너무도 많았다. 그것이 우리들의 우울이었다. 그 다음의 도적자는 매우 이지적인 제대병이다. 그는 이 일이 매우 부당하다고 하면서 법적인 대응을 불사하겠다고 자신의 뜻을 당당히 말한다. 그러나 각반들은 그에게 주먹을 날려 버리고 그 제대병은 결국 쓰러진다. 폭력에 대한 항거의 또 다른 방식이지만, 그것도 무기력하기만 하다. 도대체 폭력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양심자들이 권력의 부정성을 고발하다 철퇴를 당한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본다면, 이 방법 또한 무기력한 힘이었다는 걸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자들이 지니고 있는 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흩어진 개인의 힘을 결집하는 것이다. 한 제대병은 개인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는 항거의 의지를 그의 언술로 끄집어낸다. 이것은 개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인데, 자아의 발현을 촉구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고 있다. 혼자서 되지 않으면, 여럿이 붙어서라도 그 폭력에 맞서고 폭력자들에게 맹렬한 반격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에 있어서도 그랬다. 그러면서 민주주의가 한 걸음 진전된 것도 그 동안의 성과였다. 이문열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 민중에 대한 불신 - 비열한 지성의 허위 : 그러나 우리는 이문열의 의식에 대해 야릇한 반발을 또 가지게 된다. 그것은, 그가 민중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중들이 권력에 대해 항거하는 행동 또한 폭력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가치 판단을 하고 있다. 제대병들은 마침내 폭력자들을 징계하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 동안 억눌렸던 억울함에 대한 반동으로 그들은 이성을 잃고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거꾸로 각반들이 처참한 폭력 앞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대병들은 그칠 줄 모른다. 얼마 전까지 비굴한 굴종을 하던 것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또 다른 야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그’는 그 형태를 예리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것을 그는 대의를 상실한 맹목적 폭력으로 규정한다. 제대병들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살기 등등한 그들을 보며 그는 문득 섬뜩한 상상에 빠졌다. 만약 이 검은 각반들이 죽는다면? 만약 이들을 진실로 죽여야 할 대의가 있다면, 그에게도 동료 제대병들과 함께 살인죄를 나눌 양심과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 곳을 지배하는 것은 눈 먼 증오와 격앙된 감정이 있을 뿐, 대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 어떻게든 이들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무참히 묵살 당하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지 않았던가. 동료들이 부상당하고 피해를 당하고 있을 때 그들을 분기시키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불필요하게 난폭하게 잔인해진 것 또한 만류할 능력은 그에게 없었다. 주인공 ‘그’는 대의가 있다면 살인죄를 나눌 양심과 용기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허구에 찬 발언이다. 그는 얼마 전까지 용기가 없어 각반들의 폭력에 속수무책이었던 자이다. 그런 제대병들에게 대의를 찾으려 하는 것은 위선이며 진실의 가장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의 폭력에 맞서는 방식에 대해서 대의와 명분을 생각하는 태도를 바람직한 지성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주인공의 잘못된 인식을 보게 되거니와 이 작품에서도 그런 점은 보인다. ‘그’는 아무래도 각반의 폭력보다 제대병의 폭력에 대해 더 야멸찬 경멸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민중의 폭력에 대해서 더 큰 비애를 느끼고 있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바라보는 것을 균형 잡힌 지성이라 여기고 민중들보다 훨씬 높은 데서 바라보는 인식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그’는 한 마디로 냉소적 지성의 소유자이다. 사건의 중심에 한 번도 서지 않으면서 그 사건의 문제를 간파했다는 정신적 우월감이 비애감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홍동덕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그는 홍동덕을 아주 경멸한다. 세상을 사는 요령을 터득한 속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지성과 속물은 그 속성이 정반대이다. 그러나 그 속물이나 지성이 함께 취급받고 또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이르면 그 슬픔과 비애의 감정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는 제대병들이 벌이는 난동의 와중에서 벗어나고 만다. 그가 그 곳을 떠난 것은 적어도 인간에 대한 지적인 인식에서 온 것이다. 인간의 야만성은 본질적인 것이며, 그런 부정성은 다스려지지 않을 야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떴던 것이다. 그 때의 그의 심정은 비애와 절망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겁게 드리운 침통함으로 다른 객차에 왔을 때, 이미 와 있는 홍덕동을 보고 그는 엄청난 충격에 휘말리게 된다. 홍동덕도 그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홍동덕은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 자리를 떴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과는 동일한 것이다. 지성적 참담함이었든지 속물적 보신(保身)이었든지 간에 그 행위 자체는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세상 자체에 절망하고 있다. 그와 같은 지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참담한 깨달음이 그를 슬픔으로 몰아 넣었으며, 그런 당위적 가치는 소중한 것이라고 믿었던 신념이 무너지는 아픔에 잠기는 것이다. 이문열이 주인공 ‘그’를 이런 문제 인물로 그림으로써 지성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면, 이문열은 ‘그’라는 인물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렇게 읽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작가는 ‘그’에게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시각은 곧 작가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밀착되어 있다. 만약 주인공을 비판적으로 그리려 했다면, 어조에서 그런 비판의 목소리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런 점은 드러나지 않는다. 또 이문열의 다른 작품에서의 주제 의식으로 볼 때도,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그’는 냉소의 대상은 아니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이문열의 보수주의적 색채가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의 의식의 저변에는 지적 우월감에 대한 완강한 집착이 웅크리고 있고, 천박한 의식과 행동에 대한 경멸이 뿌리 깊이 숨어 있다. 그러나 이문열의 소설은 힘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심층 심리 속에 자리 잡은 원형적 세계의 비밀을 고통스럽게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성격이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부정적인 것이라 해도 그 주인공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순을 지닌 존재이다. 그 모순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한다. 이문열은 감추어진 그것을 드러내어 우리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이것이 그의 지성이고 힘이다.
이문열 필론의 돼지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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