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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 착빙행 해설 주제 줄거리 요약 뜻 특징 분석

by 문학정보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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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문학정보입니다.

오늘은 김창협 착빙행 에 관련 문학 정보를 알려드릴께요.

 

 

김창협 착빙행

김창협 착빙행

 

 

김창협 착빙행 해설

김창협 착빙행 해설입니다. 해방 전후에는 겨울이 되면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이를 보관해 두었다가 여름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후 서서히 제빙기술과 냉동고가 보급되면서 이런 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국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보관하고 사용한 것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삼국유사』에 신라 선비 때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시작된 것 같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부귀한 사람들이 개인 창고를 짓고 얼음을 저장했습니다. 고려 고종 때 권신인 최이가 사사건건 백성을 동원하여 개인 빙고에 얼음을 보존하였는데, 이곳에 동원된 백성이 괴로워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와 있습니다. 한겨울에 얼음을 파서 운반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고, 일손도 많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개인이 사적으로 얼음을 파 보관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신 국가가 얼음을 파서 보존관리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동호대교 부근 두모포에 동빙고 1동을 설치하여 왕실 제사용 얼음을 공급하였고, 용산 둔지산 자락에 서빙고 8동을 설치하여 궁중의 주방용 얼음을 공급하였는데, 서빙의 일부는 신하들에게 반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에 저장했던 얼음의 수량은 얼마나 되었을까요?조선시대 궁궐의 예식과 정무를 기록한 책 만기요람에 따르면 동빙고에 1만여 정, 서빙고에 13만여 정을 보관했다고 합니다.

 

김창협 착빙행 주제

김창협 착빙행 주제 입니다. 김창협 착빙행 의 주제는 이 작품은 매서운 추위에 얼음을 채취하는 노동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참상과 무더위 속에서 얼음을 즐기는 양반들의 모습을 대조하며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백성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김창협 착빙행 줄거리 요약

김창협 착빙행 줄거리 요약입니다. 동지 섣달 그믐 한강이 처음 얼어붙으면 천 명만 사람이 강물 위로 나와 천근두근 흔들며 얼음을 깎아내리면 은은한 그 소리가 용궁까지 울려 퍼지는 층의 얼음, 마치 설산처럼 쌓인 음산한 뼛속까지 스며들죠.아침마다 등에 업고 빙고에 저장했다가 밤마다 망치질 끌고 강에 모이는 누나는 낮지만 밤새 쉬어 먼저 강 위에서 노동요를 서로 주고받는 짧은 홑옷에 짚신도 없고 강이 모난 바람에 손가락이 센 바람에 말끔히 굴러갈 것 같네요.너의 얼음을 깨는 수고를 누가 말할지 너를 만나지 못했는지 길가에서 더위로 죽어 가는 백성들을 대부분 강 위에서 얼음을 캐던 사람이래요.

 

김창협 착빙행 특징

김창협 착빙행 특징 입니다. 요즘 지구온난화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한강의 어는 풍경은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매년 한강이 얼었던 것이 아니라 한강에서 얼음을 캐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조 2년 1778년에는 한강에 얼음이 얼지 않아 도성에서 100리나 떨어진 곳에서 얼음을 옮겨와야 했습니다. 당시 정조는 얼음을 파서 운반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운반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걱정했습니다. 따라서 궁중의 주방에 공급하는 얼음의 수량을 줄이는 한편, 이로 인해 백성들을 침탈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엄격한 하교를 내렸습니다.

 

김창협 착빙행 분석

김창협 착빙행 분석 입니다. 이 시에는 조선시대 얼음을 캐던 백성들의 고충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동시에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양극화된 삶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옛 철인맹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인정을 역설했는데, 그 요점은 지도자가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이 잘 살아야 나라가 안정되고 나라의 안정을 이루어야 이를 바탕으로 천자가 될 수 있고 지도자가 여민동락하지 못하면 민심이 이반되고 결국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농암은 이 시를 통해 백성들의 고난을 묘사하고 여민동락하지 못한 세태를 비판함으로써 국가의 존망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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